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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리터리 이야기

6ㆍ25전쟁 기억해야할 10가지

by 감성이야기 2017. 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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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독립국 93개국 중

64.5%가 대한민국을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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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국가보훈처가 조사한바로는 6.25전쟁에 대해 잘 모른다는 답변이 무려 23.2%나 된다고 합니다.

가장 중요한 전쟁이 발발한 해가 언제인지 알지 못한다는 조사결과가 공개되기도 했습니다.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25전쟁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대한민국 국민으로 당연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국방일보가 전해주는 우리가 알아야할 6.25전쟁 10가지를 알아보겠습니다.


01 남침

6ㆍ25전쟁은 1950년 6월25일 새벽 4시 북한군의 불법 남침으로 시작 된 한국전쟁입니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공격을 해온것입니다.

일부 연구자들은 한때 미국이 전쟁을 유도했다는 터무니 없는 예기도 있었으며

북한은 책임 모면을 위해 국군이 북침했다는 허위주장도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1990년대 초반 냉전시대의 종말과 함께 구소련 측 문서가 공개되면서 북한의

명백한 거짓임이 밝혀졌습니다.

이는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러시아의 엘친 대통령으로부터 구소련 문서 216건 548쪽을 받았습니다.

이 문서에는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돼었음을 보여주는 문서가 포함되었습니다.



02 625전쟁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이 남침함으로 공식적으로 "6ㆍ25전쟁" 이라 칭합니다.

1950년부터 1990년까지는 6ㆍ25사변 또는 6ㆍ25동란, 한국전쟁등 여러용어가 혼용

2004년 4월 교육인적자원부가 학계 전문가들의 감수를 거쳐 교과서 편수용어를 확정

공식용어는 6ㆍ25전쟁으로 사용합니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여전히 한국전쟁(Korean War)이 일반적으로 쓰입니다.



03 T-34전차

6ㆍ25전쟁 초반 서울을 잃고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는등 많은 어려움을 격었습니다.

그중 가장 고전한 무기가 바로 탱크 T-34였습니다.

북한은 소련으로부터 받은 전차 120대를 남침대열의 선봉으로 세웠습니다.

아군 보병들은 북한군 보병을 상대로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북한군이 보유한 T-34를 막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우리군은 단 1대의 전차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전차를 막을수 있는 방법도 숙달되지 않았습니다.



04 미군


1950년 북한군이 남침할 때 미군부대는 한국에 주둔하지 않았다는 사실 아시나요?

밀리터리 관심 많으신 남성분들은 다들 아시리리 6ㆍ25전쟁이후 주둔이 시작이죠

사실 적확히는 1871년 미국 군함이 강화도 해협에 침입했습니다 이를 신미양요라고 하죠

조선의 군인과 백성들은 힘을모아 미군을 몰아냈었습니다.

다시 6ㆍ25전쟁전쟁으로 돌아가면 미군은 북한의 남침을 방치할 경우 공산세력에게 침략이 용인 될수 있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줄수 있다고 우려했습니다. 1차회의에서는 미국 시민들의 철수를 지원하는 목적 정도였지만

4차회의에서 지상군을 포함 육해공 전력 모두 투입했습니다.

이때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켜내는 방어전을 책임지는 주역이 되었습니다.

전쟁에 전사한 미군만 3만 6940여명에 달합니다.

참전군인 규모는 육군부대 1개야전군(8군), 3개군단(1ㆍ9ㆍ10군단), 8개사단(1기병,2ㆍ3ㆍ7ㆍ24ㆍ25ㆍ40ㆍ45보병사단)

해군의 경우 7함대를 주축으로 하는 1개함대, 해병대에서도 1개사단(1해병)과 1개 해병항공단이 참전 했습니다.

아이오와함등 전함은 모두 4척 항모와 경항모, 호위항모까지 모두 36척이 교대로 참전했습니다.



05 낙동강전투

1950년 8월 초부터 9월 하순까지 낙동강과 대구ㆍ영천ㆍ포항 북쪽의 산악지대에서 북한군의 공격에 맞서

국군과 미군이 결전을 벌여 대한민국을 구한 중요한 전투입니다.

기본적으로 공간을 내주고 시간을 벌수 있는 지연 작전이였습니다. 1905년 8월 더이상 내어줄 공간이 없어

방어선중 한군대라도 뚫리면 지금의 대한민국은 없었을 수 도있습니다.

다행이도 치열한 전투를 치른 끝에 국군과 미군은 북한의 공세를 분쇄하는데 성공

처음으로 한국군과 미군은 서로 치밀하게 연합작전을 펼쳤습니다.

낙동강 전투는 지역별로 다부동전투, 영천전투, 안강ㆍ기계전투, 포항전투, 마산전투, 영산돌출부 전투로 구분

이중 마산과 영산돌출부 전투는 미군들이 주로 수행했습니다.



06 인천상륙작전

낙동강전투에서 방어에 성공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한 국군과 미군을 중심으로 유엔군은 인민군을 일거에 포위

격멸할 수 있는 상륙작전을 비밀리에 추진했습니다.

극동군사령관 자격으로 유엔군을 총지원했던 맥아더 장군은 미군 내부의 격렬한 반대에도 굴하지 않고

인천상륙작전의 필요성에 강력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미해군 함정과 영국ㆍ캐나다ㆍ호주ㆍ뉴질랜드ㆍ프랑스ㆍ네덜란드등 함정을 포함

총 260여 척의 유엔군 함정이 인천 앞바다로 쇄도했습니다.

한국 해군 초계함(PC)4척과 소해정(YMS)7척이 이 공격대열에 함께 했습니다.



07 지원국

6ㆍ25전쟁 때 우리나라를 도운 나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뉴질랜드,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스 터키,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콜롬비아, 태국, 필린핀 등 참전국 16개국

의료지원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등 5개국 정도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지원국이 총 63개국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병력지원 16개국, 의료지원 5개국 이외 서독, 이집트등 물자 및 복구 지원국이 총 39개국인 것으로 최종 확인

아울러 실제 지원하지 못했지만 지원의사를 공표한 나라도 브라질등 3개국으로 이들을 모두 합친 국가가 63개국 입니다.

우리는 어려울때 우리는 도와줬던 이 국가들을 기억 해야 할 것 입니다.




08 피해

6ㆍ25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습니다.

군의 전사ㆍ사망자는 13만 7899명, 부상자 45만 742명, 실종자 2만 4495명에 달합니다.

전체 인명손실은 무료 62만 1479명에 달합니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인 공산군측의 손실도 적지 않습니다. 약 200만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



09 휴전

6ㆍ25전쟁은 1953년 7월 27일 한쪽의 승리가 아닌 "휴전"이라는 형식으로 마무리 됐습니다.

이날 오전 10시 11분 유엔군 측 수석대표 윌리엄 헤리슨 미 육군 중장과 공산군 측 대표인 북한군의 남일대장이

판문점의 회담장에서 총 18통에 달하는 협정 본문과 부속문서에 서명했습니다.

실제 전방에서 총성이 완전히 멈춘 시점은 이날 밤 10시 였습니다.

당시 양측 대ㅛㅍ들이 서명한 문서의 정식명칭은 "한국 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입니다.

오늘날에도 7월 27일을 정전기념일로 기념해 오고 있습니다.

여러가지 사정으로 인해 지금도 정전과 휴전이란 말이 혼용되고 있습니다.



10 한미 상호방위조약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 건국 초부터 미국과 방위조약 체결을 계획했지만 아시아 대륙에 대규모 육군을

투입할 여력이 없다고 생각한 미국은 한국과 방위조약을 체결하는데 소극적이였습니다.

정전협정이 발효된지 한달도 지나지 않은 1953년 8월8일 이승만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경무대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그해 10월1일 정식 서명을 통해 조약이 체결 되어 60여년 동안 한반도 안전보장의 든든한 버팀목 역활을 해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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